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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스님 일요초청법회(8/16,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8-16 18:01 조회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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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째주 일요법회는 고광스님 초청법회로 봉행되었습니다.

 

고광스님의 법문영상보기

 

https://youtu.be/be5vdk7qp70

 

바라밀합창단의 음성공양은 법당을 장엄하구요.

점심공양 준비는 관음구에서 수고해 주셨네요.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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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金剛經)

法會因由分(법회의 원인과 이유)


                               단양 지장사 주지 고광스님


如是我聞一時 佛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러함과 내가 ‘한 때(一時)’임이 들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의 무리와 함께하니 1250명의 사람이 갖추어졌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드실 때라서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큰 사위성에 들어가 밥을 비셨습니다. 그 성 가운데에서 차례대로 빌기를 마치셨는데, 도리어 ‘근본 처(本處)’에 이르기에 식사가 끝나기를 살피시고서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은 뒤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 如是我聞一時 (여시아문일시)


일반적으로 이 문장을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한때에~”라고 번역하고, 여기서 말하는 ‘나(我)’는 붓다의 말년에 가장 오래 모셨던 아난존자이고, 일시(一時)는 ‘한때’ 또는 ‘어느 때’로 번역하면서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점’으로 설명한다.


정말 그럴까? 불교의 경전은 붓다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고, 붓다가 입멸(入滅)한 후에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阿羅漢)들이 칠엽굴(七葉窟)에 모여서 결집한 것이다. 경전을 결집한 아라한들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무아(無我)’를 이해했고, 그래서 자신도 그 무아라는 깨달음에 이르렀기에 그들이 아라한으로 불렸다. 그리고 아난 역시 아라한이었다. 그런 아라한들이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고 아난이 말했을 때, 과연 수긍했을까? 붓다는 무아를 가르쳤는데, 붓다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들이 경전의 시작부터 ‘나’를 등장시켰다면 과연 그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시(如是)는 ‘물리적인 객관 세상’이고, 아(我)는 ‘변치 않고 존재하는 자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 내가 뒤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외부 대상(色)으로 여겨지는 감각 신호(境)를 감각기관(根)이 감지하여 생체신호로 변환하고 다시 신경망을 통해서 뇌에 전달하면 그 뇌는 생체신호를 해석해서 ‘법(法)’이라는 환상을 창조(變易)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은 ‘나와 세상’을 뇌가 환상으로 조작해서 드러내고서 ‘하나의 시간(一時)’에 ‘내가 보고 있다’라는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 還至本處(환지본처)


일반적으로 이 문구를 ‘본래 있던 장소로 돌아와서’라고 해석하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법회인유분’이 법회가 열린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제목과 달리 금강경과 그 해설서들을 탐독해 보아도 법회의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금강경엔 ‘장소’를 나타내는 단어로 ‘所’와 ‘處’가 등장하는데, 所가 실제의 장소라면 處는 머릿속에서 ‘자아가 머무는 가상장소’인 ‘아야따나(āyatana)’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붓다 이전의 우파니샤드 시대에는 아야따나를 ‘아트만’이란 근본(本)이 머무는 장소(處)로 설명했지만, 붓다는 이 단어를 12처(處) 또는 6입(入)으로 설명했다. 


붓다는 ‘안팎의 감각 신호를 해석하여 주객이 함께 구현되는 가상장소’임을 12연기로 증명하면서 ‘자아 없음(無我)’을 밝히셨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라서, 출가자일지라도 ‘어째서 그런지?’를 올바른 견해로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2처’를 ‘본처’와 같다고 오해했다. 


한역 경전에는 ‘아(我)’라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것은 ‘나’가 아니라 ‘아트만’의 번역어이다. 그래서 경전에선 나를 ‘我’ 대신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읽어야 한다. 


또한, 경전에서는 ‘이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도 ‘至’와 ‘到’로 구분해 쓰는데, ‘到’가 물리적 거리라면, ‘至’는 정신적 거리에 이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지본처’는 붓다가 제자들에게 무아로 드러나는 12처를 가르쳤지만, 다시 자아가 머무는 본처로 되돌아가기에 그 오류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이 탁발하는 중간에 들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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