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호법및 동안거기도 입재법회(12/3,수)
본문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국토 성취한다.
12월 호법법회 및 동안거기도 입재법회가 벽암 지홍스님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금강정사에서는 동안거결제(음10/15) 하루전날인 오늘 안거기도를 입재하여 내년도
3월1일(일,음1/13)까지 기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큰스님의 10월 호법법회 "호국과 호법을 실천한 사명대사" 법문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오늘 법회사회는 대안성보살님께서, ppt봉사는 보명성보살님께서,
차량운행은 도안거사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점심공양은 수도권구(명등 대안성)
식구들이 준비해 주셨네요..^^
신도님들의 휴식처 역할을 담당했던 가피가 템플스테이 체험관 착공준비로
이사를 마무리하고 철거만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오늘부터 움직이는 가피로
법회일에 한해 운영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청정화, 길상혜 보살님께서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신도님들을 맞이해 주셨네요..
이외에도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_()_






![[복사본] 1120_목.jpg](http://www.sejon.org/data/editor/2512/20251203153159_cb78e7528d02761032cb99776b8661bb_s9nb.jpg)


호국과 호법을 실천한 사명대사
벽암 지홍스님
사명대사(1544년~1610년)는 휴정 서산대사의 제자이다. 임진왜란 때(1592년,선조 25) 위태로운 나라를 구한 스님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1559년 경북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 뒤 당시 스님들을 뽑는 제도였던 승과에 응시 2년 만에 합격했으며 32세때는 당시 선종의 수사찰 이였던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으나 사양하였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건봉사에서 승병들을 규합하여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서울 인근의 노원평과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특히 스님은 국방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팔공산성과 남한상성, 부산성 등을 축조하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보내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뜻있는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일컬어 보배를 말한 고승이라 하여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 부르면서 기개를 높이 칭찬하고 직접 뵙기를 갈망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런 사명대사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정황을 살피게 하였는데,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법문 듣기를 청하였다. 사명대사는 불법을 원하면 불법을 전하고, 시문을 원하면 일순에 일필휘지로 시문을 즉석에서 지어주니 법을 듣고 시문을 받아든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사명대사를 찬탄하고 숭배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사명대사는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였던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만나 조선과 일본의 화친에 대해서까지 논하는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잡혀간 3천5백여명의 동포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명대사의 외교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전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었고, 정식으로 조선통신사가 오가며 우리나라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당시 왕이었던 선조대왕이 왜군들이 조선으로 몰려오자 자기 나라와 백성들을 버리고 중국으로까지 피난길에 오르려고 했지만, 사명대사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복을 선혈로 적셔가며 일본군과 싸워 나라를 지켜냈다.
스님은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살생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지엄한 계율을 범하면서까지 가장 앞에 나서서 다른 의병들을 지휘했고 목숨을 던져 전투를 하여 나라를 지켰다. 전란이 끝나자 선조 임금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스님들에게 관직을 수여했지만, 스님들은 미련 없이 산승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스님들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도성 출입을 제한할 정도로 많은 탄압을 가했다. 바로 그러한 때 사명스님의 이러한 활동은 숭유억불정책의 명분을 조금이나마 약화시켜 조선불교가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호국과 호법(護法)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사명대사의 일화
“조선의 보배는 장군의 목이오.”
사명대사의 기개는 일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으니 ‘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문’에 의하면, 선조27년(갑오년) 4월, 7월, 12월, 3차로 사명대사는 조선침략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마사(淸正)’의 진중에서 가요마사를 만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에 대해 항변할 적에 가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조선에 보배가 있습니까? ”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습니다. 조선의 보배는 일본에 있지요.”
“어찌하여 조선의 보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요? ”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장군의 머리를 베고자 합니다. 장군의 머리가 조선의 보배이지 않습니까? ”
사명대사의 말을 들은 가요마사는 일순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손이 칼자루를 잡았으나, 사명대사의 기개를 감탄하고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며 껄껄 웃고 휘하 장수들에게 사명을 가리키면서 “ 조선의 고승이시다, 잘 모셔라.”라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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