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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4월 둘째주 일요법회(4/10,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4-10 15:37 조회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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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보다는 좀 더 따스한 기운이 있는 4월의 아침, 둘째주 일요법회를 석두스님을 모시고 봉행하였습니다.

사부대중들이 한마음으로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정진 일환으로 부처님 말씀이 담긴 보배경을 다함께 합송합니다. 이어서,“ 집착과 무집착 라는 주제로 자기중심적 관념들이나 견해만을 앞세우기보다 서로다름에 대한 이해에 하여 석두스님께서 법문하셨습니다.

사회에 도안 거사님, 집전 법성 거사님, ppt 자인향 보살님, 발원문 낭독에 한산 거사님, 온라인 방송송출에 지승 거사님, 발열체크 및 점심 공양물 나눔에 문수2구였습니다.

 

석두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 : https://youtu.be/vy8lszKt-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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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과 무집착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


“비록 한밤중일지라도 새벽이 거기에 있으며, 새벽이 온다 해도 그것이 밤중이다.”고 옛 선사께서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은 부처님에게서 조사들께로, 다시 조사들에게서 우리에게까지 면면히 전해오는 깨달음을 전해 준다. 밤과 낮은 다르지 않다. 같은 것이 때로는 밤이라 불리고 때로는 낮이라 불린다. 밤과 낮은 하나이다.

 

좌선과 일상적 활동은 하나이다. 우리는 좌선을 일상생활이라고 하며, 일상생활을 좌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이제 좌선이 끝났으니 일상적인 활동을 하러 가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그것들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활동 속에 고요가 있어야 하며, 고요 속에 활동이 있어야 한다. 각개의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분리된 개별 존재는 없다. 한 존재에 대한 많은 다른 이름이 있을 뿐이다.

 

때로 사람들은 단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도들에게는 바른 태도는 아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것도, 단일성조차도 강조하지 않는다. 단일성도 가치 있지만 다양성 또한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절대적 존재를 강조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이해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단일성과 다양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단일성과 다양성은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각개의 존재 속에 있는 단일성이 음미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의 어떤 특정한 상태를 강조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매순간, 그리고 각각의 현상들 속에서 실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옛 선사께서는 “비록 모든 것이 불성일지라 할지라도 우리는 꽃을 사랑하고 잡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인간성의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처의 활동이다. 우리가 잡초를 좋아하지 않는 것 또한 부처의 활동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어떤 것에 집착해도 상관이 없다.

 

만약 그것이 부처의 집착이라면 그것은 무집착이다. 그러므로 사랑 속에는 미움 또는 무집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미움 속에는 사랑 또는 용납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이다. 우리는 사랑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미움을 받아들어야 한다. 우리가 잡초를 어떻게 느끼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어야 한다. 여러분이 잡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마십시오. 잡초를 사랑한다면 사랑하십시오.

 

보통 여러분은, 주변의 것들에 대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책망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용납의 방식과 우리가 용납하는 방식은 똑같아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매우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밤과 낮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 없다는 것을 배운 바 있다. 이것이 하나임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옛 선사께서는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그대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불교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대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무엇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배우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인가를 알기 이전에 ‘나’와 무엇인가를 안 이후의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무지한 자와 현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둔한 삶은 현명한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은 우둔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는 우둔하고 나는 현명해.” 라든가 “나는 우둔했는데 지금은 현명해.” 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우둔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현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이해는, 우둔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지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붙잡을 방법이 없으며, 붙잡을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더라도 꽃은 지고, 우리가 사랑하지 않더라도 잡초는 자란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삶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며,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있는 무엇이다. 생각의 영역 속에서는, 단일성과 다양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실제 경험 속에서는 다양성과 단일성은 같다. 여러분은 단일성이나 다양성과 같은 관념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여러분은 끝없이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 실제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정서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 문제들은 실제로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의 자기중심적 관념들이나 견해에 의해 형성된것들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문제들로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특별히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복은 슬픔이며, 슬픔은 행복이다. 곤란 속에 행복이 있으며 행복 속에 곤란이 있다. 비록 우리가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 해도 그것들은 실제로는 다르지 않으며, 본질에서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참다운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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