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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4월 둘째주 일요법회(4/11,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4-11 17:08 조회5,0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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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라기엔 너무 따스한 4월의 아침, 둘째주 일요법회가 석두스님을 모시고 봉행되었습니다.

 준비된 마음, 정념(正念)라는 주제로 시작하신 법문은 [선입관을 버리기-중도]에 대해서도 살짝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저는 나의 입장에 따라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나아가 나의 마음은 준비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시지 못해 석두스님의 좋은 말씀을 놓치신 분들은 유튜브로 꼭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석두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 : https://youtu.be/u9cdfWIH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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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둘째주 일요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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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한 마음으로 예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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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조기종식을 발원하며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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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기전 잠시 명상으로 마음을 챙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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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의 법문 주제 [ 준비된 마음, 정념(正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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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홍서원을 끝으로 법회를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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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마음, 정념(正念)

석두스님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공(空)의 관념입니다. 우리가 공의 관념을 이해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공성을 깨달은 뒤에는 모든 것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공의 일부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단지 잠정적인 형태와 색깔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잠정적인 존재들 각각의 참 의미를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잠정적인 존재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우리 대부분은 실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릇된 견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물들은 보는 우리의 방식은, 모든 것이 단지 잠정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실망하게 되는, 자기중심적인 관념들에 뿌리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서는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모든 것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이후에 고통을 극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깨닫는다.“고 말하지만 진리의 깨달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것은 좌선을 수행한 이후가 아닙니다. 좌선을 수행하기 전에도 깨달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진리를 이해한 이후가 아닙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해나 수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수행하기 전에도 깨달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선수행과 깨달음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여기에 안경처럼 수행이 있고 우리가 안경을 쓰는 것처럼 수행을 사용할 때 깨달음을 본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안경 자체가 깨달음이며 그것을 쓰는 것 또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도, 깨달음은 거기에 항상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보리달마의 이해입니다. 여러분이 좌선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참다운 좌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행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깨달음이 있으며 거기에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수행할 때,  여러분은‘너’또는 ‘나’ 같은 어떤 구체적인 관념을 만들어 낼 것이며, 수행이나 좌선 같은 어떤 특정한 관념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기 오른편에 있고, 좌선은 여기 왼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좌선은 별개의 것이 됩니다. 좌선 속에서 수행과 여러분이 결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개구리의 좌선입니다. 개구리에게는 앉는 자세가 좌선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뛸 때 그것은 좌선이 아닙니다. 공이란 모든 것이 항상 여기에 있음을 뜻한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할 때, 이런 오해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의 전체적인 존재는 모든 것들의 집적이 아닙니다. 하나의 전체적인 존재를 부분들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으며 항상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어떤 특별한 수행도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고......“라고 말합니다. 이 무심(無心)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선심(禪心)입니다. 우리의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뭄이 없이 생각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에 충분할 만큼 유연해야 하며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가 유연할 때, 그것을 흔들림 없는 사고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항상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사고는 참다운 사고가 아닙니다.
 
집중이 우리의 사고 속에 현전(現前)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념입니다. 대상이 있든 없든 여러분의 마음은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좌선입니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는 일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생각할 뿐이며, 아무런 노력 없이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볼 뿐입니다. 그저 보는 것, 그리고 온 마음으로 사물들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생각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정념이라고 합니다. 정념은 곧 지혜입니다. 지혜라는 말은 우리의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철학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준비된 상태,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갖가지 철학과 가르침들일 수 있을 것이며, 갖가지 종류의 탐구와 연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특정한 지혜에서는 안 됩니다. 지혜는 배워야할 무엇이 아닙니다. 지혜는 여러분의 정념에서 나올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물을 관찰할 준비가 되는 것, 생각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마음의 공입니다. 공은 좌선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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