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둘째주 일요법회(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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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일) 둘째주 일요법회가 석두스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석두스님의 "한바탕 꿈이로구나" 법문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법회후 대체식으로 나누어드린 김밥공양은 가을단풍 나들이 기분으로 진행되고
오후1시부터 교육관에서는 전법단 송년법회가 큰스님을 모시고 진행되었네요..
한해의 마무리가 벌써 시작되네요..^^
오늘의 법회모습.. 사진소식으로 함께하세요~~~~











한 바탕 꿈이로구나...
관악산 관음사 주지 석두스님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일체의 양변은 짐작으로 말미암음이로다’
환몽공화(幻夢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가.
‘꿈이요 환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이변(二邊)’은 불교 교리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용어입니다. ‘중도(中道)’와는 대비되는 용어로 쓰입니다.
붓다께서 살던 시대에는 브라만이라는 절대자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주재하고 있으며, 그의 내재된 품성이 ‘아트만’으로 표현된 존재로 각 개인들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절대자인 신’과 ‘피창조자인 나’ 이 둘을 갈라놓고 이 세계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후대에 [우파니샤드]시대에는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현상적인 세계는 늘 이분법적으로 우리들 눈앞에 보이고 해석됩니다. ‘하늘과 땅’ ‘딸과 아들’ ‘사랑과 미움’ ‘산과 바다’ ‘선과 악’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세상은 이렇게 두 가지의 모습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이런 생각으로 인해 많은 불행과 분열이 생기게 된 것임을 붓다는 통찰했고, 이해했으며, 그리하여 온 생애를 바쳐 ‘중도’의 견해를 이해시키려 노력하셨습니다.
현상의 세계는 본질의 세계의 일면을 보여 줄 뿐입니다. 더 깊이 있게 말한다면 이 둘을 구별하여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일즉일체 다즉일, 일중일체 다중일(一卽一切 多卽一, 一中一切 多中一)’
중도적 견해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분법적인 견해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은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단순하게 우리에게 보이는 ‘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H2O’로 수소분자 2개와 산소분자 1개의 결합입니다.
우리 눈에 현상적으로 보이는 단순한 형체의 물이 사실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물은 물인가요? 산소인가요? 수소인가요? 물리적인 세계만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까요?
일체는 한 쪽의 모습만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분열된 사고를 낳고, 분열된 사고는 치우침과 갈등을 내포할 것이며, 이러한 생각들이 지속된다면 세상은 갈등과 혼돈의 아수라장이 될 것임을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치우친 생각은 타인의 의견을 도외시하고 내 생각에 천착하게 되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짐작’은 합리와 올바른 이해의 태도와는 다른 생각이며, 자기 생각의 객관화가 되지 못한 치우친 사고방식입니다. 수용적 태도와 열린 사고는 ‘중도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내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는 중도적 길로 들어가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한 번 쉬고, 잘 관찰하고, 올바로 생각하려 하고, 내려놓는 생각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해결 방법은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 내 욕망이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해되고, 알아차리게 될 때, 놓을 수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갖고 싶었던 과거의 그 무엇이,
지금도 간절하게 원해 지십니까? 기억이나 선명하게 나십니까?
힘들면 놓아주고, 아프면 피하시면 됩니다.
다 한바탕 꿈이라고 옛 선사들이 이렇듯 간절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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