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둘째주 일요법회(12/14,일)
본문
12월 둘째주 일요법회(12/14,일)가 석두스님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법문에 앞서 보현행자의 서원 제4분 찬양분을 다함께 합송합니다.
"부모님께 공양하겠습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공양하겠습니다.
형제와 이웃과 모든 동포, 모든 인류에게 공양하겠습니다.
이 생명 영원하고 청정함과 같이 영원히 법공양을 행하겠습니다."
오늘 석두스님의 수행법문 주제는 "진정한 사랑은 무심(無心)이다." 입니다.
스님의 법문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법회후 전법단 식구들께서는 금강정사를 처음 방문하신 두분께 안내를 담당해 주시구요.
공양실 점심공양은 문수2구(명등 월산) 식구들이 콩나물 비빔밥으로 맛난 점심을 준비해 주셨네요.. ^^
공양후 오늘은 전법단 12월 정기모임날...설법전을 가득 매운 포교사님들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지난주 새롭게 관음구 5법등(72기 기본교육수료생 법등)으로 창등한 식구들도 차한잔 함께 합니다.
법회소식... 사진으로 함께하세요~~~^^










진정한 사랑은 무심(無心)이다.
관음사 주지 석두스님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眼若不睡(안약불수)하면 諸夢自除(제몽자제)요
心若不異(심약불이)하면 萬法一如(만법일여)니라.
‘득실시비를 일시에 놓아 버려라’
‘만약 눈이 잠들지 아니하면 꿈은 스스로 없어지게 됨이요’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아니하면, 만법은 같음이로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을 것이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재물을 얻으면, 손실이 뒤따르고 명성을 얻으면, 곧 불명예를 얻을 확률이 높게 됩니다. 옳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 그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네 삶을 고달프게 하는 정신적, 본능적 충동은 아마도 ‘득실시비’의 무의식적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득과 실’에 민감하게 되면, 주위에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시와 비’를 너무 따지게 되면, 아마도 어느덧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회적 환경의 입장에서도 이 정도인데, 마음공부에 측면에서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근시한적으로 보게 되면‘득과 실’이 확연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보게 된다면 생각만큼‘득과 실’이 확연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실’이 ‘득’이 될 수 있고,‘득’이‘실’이 될 수 있음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음공부는 미래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중시합니다. 이용가치, 활용 가치적 측면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아니,‘가치’라는 용어 속에는 벌써 짙은‘득실’의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가치’라는 용어 대신에‘인연’이라는 말이 맞을 듯합니다.
지금의 인연에 충실한 사람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기본기가 갖추어진 공부인입니다.
‘인간적 가치’‘물질적 가치’‘재산적 가치’ 이 단어들은 다가올 미래를 상정하고 있는 용어들입니다. 마음공부는‘가치’가 아니라, 지금 내 눈 앞에 실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그리고 내가 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존하는 느낌을 온전히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지금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인에게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무심’입니다.
미움은 모두 버려야만 되는 부정적 감정이지만, 좋은 사랑도 버리고,
무심에 이르러야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속적 사랑은 시효가 있게 되지만, 무심한 사랑은 시효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이 보다 큰 사랑입니다.
‘잠들지 않는다’는 말은 깨어있음을 의미합니다.‘깨어있음’은 상식적이며, 도식적인 관점을 벗어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의 지평선이 넓어지게 되고, 인식의 확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세상을 가치로 따지지 않고,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안목이 밝아져서‘본심’이‘즉심’이 되고,‘즉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아는 만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내가 아니라, 모든 인연이 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지게 되어, 자와 타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돌아가게 됨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만법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