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금강위크 고광스님과 싱잉볼명상(8/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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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문학으로 만드는 마음의 평안 금강위크(week) 명사초청법회 및 싱잉볼명상 1회차 행사가
8월17일(일) 진행되었습니다.
문학, 명상, 예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금강위크에서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고, 내면의 평온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진행된 이날 행사는 고광스님 초청법회와 싱잉볼 명상 프로그램이
색다른 체험의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고광스님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법문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법문에 앞서 보현행자의 서원 제6분 수희분을 다함께 합송합니다.
바라밀합창단의 음성공양 "아버지" 곡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고기잡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법회 사회는 지승거사님께서, 집전은 청여거사님께서, ppt봉사는 여래행보살님,
발원문 낭독은 대륜성 보살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점심공양은 보현구(명등 안도 류차열) 식구들이 함께해 주셨구요.
법회이후엔 관음구 식구들이 동하스님과 기념촬영도 함께했네요..
오후1시부터 진행된 싱잉볼 명상프로그램은 색다른 명상체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대웅전 법당을 싱잉볼의 울림으로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기회와 경험을 선사합니다...
오늘의 법회현장.. 사진소식으로 함께하세요~~~~
태어남과 죽음(生死)
법주사 노전 고광스님
(대보적경) 94권에는 “여기 중생은 ‘어느 장소(何處)’로부터 오게 되었으니, 가서 이를 데도 ‘어느 장소(何處)’이다. (此衆生從何處來 去至何處 / 차중생종하처래 거지하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의 ‘어느 장소(何處)’는 무슨 뜻일까요? 불교 경전에는 ‘장소(處)’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장소(處)’를 이해하지 못하면 몇십 년을 배우고 수행했을지라도 수박의 겉을 핥을 뿐, 수박의 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다 보면, 반드시 재(齋)나 제사(祭祀)를 지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스님들의 염불 소리를 듣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生從何處來(생종하처래) 태어남은‘어느 장소(何處)’로부터 오게 되었으니
死向何處去(사향하처거) 죽음도 ‘어느 장소(何處)’를 향해서 가게 된다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태어남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소멸함이라.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구름 그 자체는 근본이 진실로 없으니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도 또한 그러하거늘
獨有一物常現露(독유일물상현로) 홀로 존재하는 한 물건이 언제나 노출되어 드러나지만
湛然不隨於生死(담연불수어생사) (장소의 생각이) 고이고 나면 태어남과 죽음을 따라가지 않는다네.
그렇다면 장소(處)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 장소는 범어의 아야타나(ayatana)를 번역한 단어로 외부에 있는 실제의 장소가 아닙니다. 불경에서 외부의 장소는 소(所)자를 씁니다. 이 장소(處)는 고대 인도 사상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우리의 몸 안에 있는‘아트만(자아)이 머무는 장소’를 뜻했습니다.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도 이들과 이름만 다를 뿐,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몸에 영혼이 있어서 눈을 통해서 존재하는 세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의 진실한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운전자와 자동차의 관계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차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지만, 운전자가 차를 운전하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알다시피, 6년이란 길다면 긴 시간을 치열하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과연 ‘몸과 마음의 관계’가 ‘6년을 수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깨달음’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평생 제자들에게 무아(無我)를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아트만(영혼)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무아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이 ‘장소(處)’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처(處)’는 기존의 ‘자아(영혼)가 머무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영혼이 머무는 장소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는 무엇이 다를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그 차이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눈, 귀, 코, 입, 몸의 5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영혼이 외부의 대상을 느끼려면 이 다섯 감각기관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생각도 함께 관리해야 하므로 감각 지점은 6개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정말 영혼이 이것들을 바삐 오가면서 관리한다는 생각에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본다는 것’은 ‘외부의 대상에서 튕겨 나온 빛(色境)’이 ‘눈의 내부(眼根)’로 들어와 시각세포가 그 빛을 감지하면 빛 신호를 전기신호로 변환(變易)하여 시신경을 통해서 뇌에 전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몸에서도 전기신호가 만들어져 신경망을 통해서 역시 뇌로 전달됩니다.
그렇게 뇌에 전달된 시각신호와 몸에서 전달된 내부 신호를 뇌는 해석하고 과거의 기억과 비교 분석하여 가상으로 ‘보는 나(眼內入處)’와 ‘보이는 대상(色外入處)’을 함께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내가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는 의식(眼識)’이 일어납니다.
사실 뇌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두개골(頭蓋骨)로 덮여 있고, 또 그곳을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지 못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세상이 과연 진실일까요? 사실 우리가 바라보는‘나와 세상이란 존재’는 뇌의 상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실이라고 ‘뒤집힌 꿈같은 상상(顚倒夢想/전도몽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세상이 ‘외부에 있는 세상(世間)’이 아니라 ‘뇌가 상상한 세상(法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에 다니진 않더라도 한국 사람이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색(色)은 ‘외부의 존재’인데, 알고 보면 이것이 ‘비었다’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실제의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뇌가 외부 신호를 해석해서 ‘가상의 공간에 구현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반야심경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是諸法空想 (시제법공상) 이런 모든 존재는 법(法)이라서 비어있는 상상이니
不生不滅(불생불멸)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不垢不淨(불구부정)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不增不減(부증불감)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是故 空中無色(시고 공중무색) 이런 까닭에 비어있는 그 가운데는 (존재하는) 색(色)도 없고 無受想行識 (무수상행식) (존재하는) 느낌(受), 상상(想), 행업(行業), 인식주체(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실제 세상(世間)’이 아니라 ‘법으로 된 세상(法界)’이라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번뇌를 내려놓거나 끊으려는 게 아닙니다. 명상(冥想)이 ‘그윽하게 상상하는 것’이라면, 불교의 수행(修行)은 ‘행(行)을 닦는 것’입니다. 이 행은 행동을 닦는 게 아니라 ‘생각의 진행’을 의미합니다. 중생은 나라는 존재가 외부의 존재를 마주하며 그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깊은 사유로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와 세상은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란 가상공간에서 ‘구현된 환상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하기에 ‘태어난다거나 죽는다(生死)’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貪瞋癡/탐진치)’이 일어나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번뇌는 끊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뇌는 절대로 끊거나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번뇌는 나와 세상이 존재가 아니라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힙니다. 가라앉힌 마음 상태는 번뇌를 잠시 내려놓게 만들지만, 명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출렁거리면서 순식간에 원상 복귀 되어버립니다. 명상으로 마음이 고요해졌더라도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음을 곧바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해보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 후 6일 만에 미련없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닦으려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소비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나면 앉아서 일생을 소비하며 살고 싶은가요? 그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이니까요.
부처님은 해탈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위와 같이 바른 견해가 서지 않는다면, 번뇌를 끊겠다고 쓸데없는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인생이 생각보다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명상한다고 아까운 시간 보내지 말고 바른 견해(正見)로 바르게 사유(正思惟)하여 ‘존재’가 아니라 ‘환상으로 된 법’임을 깨달아 대자유의 행복(正定)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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