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일요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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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만나서 다행이야' 라는 테마로
1월14일 일요법회에는 불광사 교무국장스님이신
석두스님께서 발심수행장 내용으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불광사 교무국장 석두스님
夫 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부 제불제불 장엄적멸궁 어다겁해 사욕고행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慾不捨
중생중생 윤회화택문 어무량세 탐욕불사
이곳은 금강정사입니다. 금강은 결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가장 단단한 물건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을 의미하기도 하고, 보리의 참 지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사는 법을 펼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도량을 말합니다.
'붓다의 법을 가르치는 집'으로 의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붓다의 법은 팔만사천의 법문이 있으니 어느 세월에 다 읽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를 잡아 두루 통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와 부처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믿고 법답게 그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대사께서 저술하신 발심수행장의 첫 문장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고 분별합니다. 왜 그렇까요?
위 문장의 표면적인 해석에 머무르면 중생은 고행은 멀리하고 탐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 고행을 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탐욕을 채우고자 출가한 것도 아닙니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세상에 대한 혐오의 마음이 앞선 것 뿐 입니다. 전 그냥 목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을 하나 둘 씩 익히면서 감사하는 마음과 다행지심이 느껴졌습니다. 이제서야 인연법의 의미가 조금 보입니다.
속세는 저를 괴롭힌 적이 없었습니다. 저를 슬프게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망상이었습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부처는 중생을 부처로 보고, 중생은 중생을 중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마치 괴로움을 준 대상은 없었는데 저 혼자 괴로워하며 출가했듯이 말입니다. 중생은 나와 보이는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업식이 있습니다.
이 분별의 업식으로 인해 중생의 괴로움은 시시로 찾아옵니다. 괴로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괴롭게 보는 놈이 문제인 것입니다. 난행고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한 번 쓰기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고,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의 세계를 벗어난 부처의 세계는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이 정토이며, 이 땅이 예토인 것입니다. 지옥과 천당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마음을 잘 쓰면 천당이요, 마음을 잘 쓰지 못하면 그 자리가 지옥으로 변할 뿐 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면 문제가 되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의 전환이 그리 쉽지는 않기에 중생은 여전히 중생노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수행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정확히 말하면 쓰는 것이 아니라 잘 보는 것입니다. 잘 보이기 시작하면 그 때가 잘 쓸 수 있게 되는 때입니다. 붓다께서 초기에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수행법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사념처(身受心法) 수행법입니다. 예를 들면 먼저 몸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낌을 보고, 마음을 보고, 법을 관찰하면 원효대사가 지적했던 중생의 탐심이 덧없음이 실감되고, 실감됨으로 떠나게 되고, 떠나게 됨으로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잘 보려고만 애를 써보십시요. 한 번 쉬고, 두 번 쉬면 그렇게 무루 익어 가면, 쉬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쉬어질 때가 올 곳입니다.
명심하세요. 괴로움을 주는 놈은 밖에서 오지 않고 안에서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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