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일요법회
본문

진리는 한 우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석두스님)
"진리는 늘 한 우물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사실 중요한 지식을 보더라도.
그건 언제나 피상적이라고 믿고 있네. 심원한 것은 진리가 있는 산 정상이
아닌 진리를 찾는 과정에 놓여 있지. 이런 종류의 실수는 천체 관측에서 전형적으로 들어나네. 막상 중심보다 약한 빛에 더 민감한 망막 가장자리를 별로 향하게 하여 곁눈으로 별을 보는 것이 별을 분명히 보고 그 빛을 알아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네. 빛은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에 비례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니까. 똑바로 쳐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빛의 양은 매우 많지만 곁눈질 해서 보면 더 민감해질 수 있지. 지나친 통찰력은 우리를 혼란시키고 사고력을 약화시키지. 금성도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중해서, 지나치게 똑바로 지켜보면 사라지는 법이네."
-- [모르그 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대 종교는 모두가 각자 종교의 진리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 붓다께서도 초전법륜부터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위대성은 진리를 말하되 진리 그 자체 보다는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고 이 땅에 진리가 체화되기를 더욱 발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형이상학적인 담론보다는 삶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에게 현실적인 고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팔정도라는
실천행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첫번째의 실천행이 정견(正見)입니다.
'바로 보는 것'
이것이 고통의 삶을 행복의 삶으로 바꿀 수 있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그러면 올바르게 본다는 문제에서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올바른 것이 있다는 전제는 그른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됩니다.
정말 옳음과 그름은 따로 따로 존재해서 우리는 그 때의 상황과 사건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는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네 삶의 여정 속에는 분명히 둘 중 하나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들이 무수히 발생했으며 앞으로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문제가 왜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날까요? 붓다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불교용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물을 보고 물고기는 집으로 보고, 아귀는 피와 고름으로 보며, 천인은 반짝이는 보석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인간에게만 물로 보이지 우리와 다른 입장에 있는 존재들의 눈에는 그들의 업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은 물이 아닐 수도 있고, 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교인의 관점은 늘 이런 관점에서 사물과 사건과 인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곳에는 다툼도 없으며, 소외도 없으며, 외로움도 없으며, 심지어 죽음과 삶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법안장을 갖춘 사람이라야 고와 낙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 정신에 비추어 말하면 가장 불교적이 아닌 사람이 가장 불교적인 사람이 되는 이치입니다.
'나는 불교인이다' 라고 주장하는 자는 불교가 아닌 종교는 진리의 종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불자는 자기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진리가 될 수 있다고 열린 시각으로 포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의 사실에 집착하는 순간, 나는 그 안에 갖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고립되어 편협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깨달음을 이르는 길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라 깨닫겠다는 그 마음이 오히려 깨달음을 장애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자에게 행복은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와 다름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는 어리석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의 안목이며, 보살의 법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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