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째주 일요법회(9/9)
본문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석두스님)
오늘은 조금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면서부터 환경의 지배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타고난 유전자도 어찌 보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외부적 환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온통 환경의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껴지는 것을 통해 자아를 형성해 가며, 나와는 별개의 세상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직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한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오감을 통해 아는 세상이 참으로 그와 같이 진실로 외부에 존재할까요?
그것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일까요?
부파불교는 치열하게 이 외부의 물질이 참으로 존재하는가를 증명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의 근원까지를 철학적으로 사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질은 극미로서 존재한다'
현대과학으로 말하면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교학을 받치고 있는 양대 철학 중 유식학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유식논사들은 단언합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식뿐 경계는 없다.'
유식의 주장을 우리는 쉽게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경험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할 수 없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이 허상이요, 가짜라니,.....
그런데 이 주장이 단순히 유식에서의 주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는 '만법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이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 했습니다.
유식과 공철학과 화엄경과 금강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낙처는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위해서는 다시금 근본불교에서 말씀하시는 붓다의 교설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이며, '일체개고'이니라.
붓다의 최종 목표는 '해탈'입니다. '해탈'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심적으로 구속되어 있기에 괴로움을 느끼고, 고를 느낍니다.
그것은 집착에서 오는 '갈애' 때문입니다. 갈애는 욕망을 불러옵니다.
욕망의 끝은 우주의 팽창과 같습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존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깨달은 자는 유에서 자유로우며 무에서도 자유롭습니다. 둘 다 망상이요, 허상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애가 다한 자'라고 합니다. 욕망과 욕탐에서 오는 고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을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로 전락한 종교는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머리는 하늘을 이고 있으나, 두 발은 현실의 천박한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수 천년을 이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바로 보는 자는 세상을 바로 보는 자'입니다.
어록에 이르기를 '정념(正念)이란 무엇인가?'
'정념이란 모든 것이 오직 이 마음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보는 자 세상을 바로 보는 자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