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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12월 2째주 일요법회 봉행(12/9, 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12-09 12:22 조회2,0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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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째주 일요법회가 60여명의 신도님들과 함께 중흥사 주지스님이신 석두 스님의

무명에서 벗어난 삶을 살수 있도록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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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원문 낭독자: 혜명등(강귀선)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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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시각 설법전에서는 어린이법회가 휴담스님의 지도로 봉행되고 있습니다.)

 


무명에 대하여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붓다는 ‘인간을 잡아서 질질 끌고 가는 것이 탐욕이요, 거센 격류이며, 욕망의 더러운 늪이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표현으로 인간이 집착한 결과 나타나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욕망을 탐하고 열중하고 탐닉하고 있다’라든가, ‘생존에 대한 그릇된 집착에 얽매여서 떨고 있다’라는 표현을 대하자면, 평소 온후하고 원만하며 자비로운 붓다의 생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우 엄격한 인간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의 이러한 인간관은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부터 고행이나 선정을 통해서 명확하게 인간의 현실을 파악한 결과이다. 붓다는 인간의 아집과 망집은 웬만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극히 뿌리 깊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깊이 사색해 들어가는 힘이 남달리 강했던 붓다는 그 사유의 힘으로 아집과 망집의 근원을 추구해 갔다. 아집의 근원을 추구해 가자, 마침내는 근본 무지라고 부를 만한 것과 마주쳤다. 그 앞에서는 더 이상 의식은 통하지 않는다. 인식의 한계이다.

무의식의 어두움, 카르마의 어두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마치 오염된 강가에 쌓인 폐수 찌꺼기처럼, 얼마나 심하게 오염됐고 끈적이며 서로 엉켜있는지, 붓다는 이것을 ‘욕망의 더러운 늪’이라고 표현하였다. 아집은 그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것을 ‘무명’이라고 불렀다.

무명은 본래 지혜가 없는 것, 눈이 어둠에 가려서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경전에서는 그런 무명을 연기나 네 가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 진리의 가르침에 무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명은 교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사유와 선정에 의해서 파악된 인간 존재의 근본을 표현한다.

후세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 학파 가운데 유가행유식파가 있다. 유가행은 선정의 실천을 말하는데, 이 계통의 수행승들은 선정을 아주 깊은 경지까지 닦아서 인간의 번뇌와 아집의 근원을 탐색했다. 이 학파에는 아상가와 바수반두라고 하는 걸출한 학승이 있는데, 이들은 아집의 근원으로서 아라야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즉 우리 마음의 바닥에는 아집과 망집의 원인이 되는 씨앗(종자)을 저장하고 있는 아라야식이 있어서 설령 마음작용이 완전히 멈춘 최고도의 선정인 멸진정에 든다 해도 그 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거센 물결과 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집과 망집이 무의식의 저변에 있는 아라야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집착이란 그렇게 쉽게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과 관찰이 이어지면 마침내 인간의 번뇌와 생사에 대한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인간존재에 대한 관찰과 반성은 바로 불교를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고, 그에 따른 자기정화는 붓다 이래 일관되게 흘러온 불교의 전통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수행승들이여! 중생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어서, 유전하고 윤회하고 있는 그 본제는 알 수가 없다.”
[상응부경]
붓다는 이렇게 설법을 마친 뒤 제자들과 다시 이런 대화를 나눈다.

붓다 : 대중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대해의 물과 지금까지의 길고도 긴 과거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흘렸던 눈물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까?
수행승 : 세존이시여! 저희는 세존의 가르침에 의해서 일찍이 길고도 긴 과거세에 흘렸던 눈물의 양이 사대해의 물의 양보다 더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붓다 : 착하구나!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구나.
수행승들이여! 너희가 어머니의 죽음을 만나고, 아들의 죽음을 만나고, 딸의 죽음을 만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만나서 흘린 눈물은 저 길고도 긴 생사윤회 사이에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 되니, 사대해의 물의 양은 그에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상응부경전]

무명에 덮이고 그릇된 집착에 묶여서 생사윤회 하다가 나는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해 있다. 그런 나의 존재는 얼마나 깊은 목숨의 그물코와 같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쯤 되면 그릇된 집착이나 무명이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물에 걸쳐 연결되어 있다. ‘나는 무한한 중생의 슬픔 위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한 가운데 그릇된 집착을 극복하고 집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집착의 근본인 하찮은 애욕에 제 몸을 맡겨버리는 사람은 온갖 근심이 불어난다. 비가 내린 뒤 비라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듯이.” [담마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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