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1월 초하루 법회(1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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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1월 초하루 법회가 영하의 날씨에도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법하게 봉행 되었습니다.
이번 한달도 무탈하게 잘 지낼수 있게 화엄성중님께 열심히 기도올리신 보살님들 기도 성취 하세요.
초하루 법문은 포교원장이시며 주지스님이신 至弘스님께서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해 보라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신심을 돋우시는 유진스님


철산구에서 맛있는 공양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성찰의 시간
주지 벽암 지홍스님
매년 그렇듯이 올 한해도 많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저물어가고 있다. 고운 빛깔로 물들었던 가을 단풍축제가 끝날 때 쯤, 휑하니 나무들이 맨몸을 드러내고 세찬 바람과 힘겨누기를 하듯 차갑게 서있는 겨울, 연말 즈음이면 문득 ‘지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고 자신을 살피게 된다.
성찰의 시간, 그것은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 ‘여기가 어디쯤일까,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지도를 펴보는 일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속성이 흐름과 변화의 연속(無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가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 삶은 세상의 오탁의 흐름이 휘몰아가고 있다. 허위, 허욕, 위선 따위들로 겉돌고 있다. 자신, 자신의 삶과 솔직하게 마주하는 성찰은 낯설고 서툴다.
정치인들도 그렇다. 정말로 문제 해결 의지가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된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쟁점화해서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에만 힘을 쏟고 있다. 약자의 진실은 거대한 힘의 그늘에 가리고, 또 사람들은 깊은 생각없이 자신이 편리한 대로 믿고 지지한다. 상처에 상처를 보태고 문제는 쌓여간다.
『 푼나까가 물었다. 고통의 근원을 보았으므로 그 어디에도 동요하지 않는 부처님 당신께 묻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신들에게 제물(祭物)을 바치고 있습니까?
푼나까여, 사람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늙은 뒤에까지도 지금 젊음과 같은 생존 상태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고 쇠악해 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은 이 생존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느니, 그들은 결코 탄생(生)과 늙음(老)의 차원을 넘어가지 못한다.
푼나까가 물었다. 친절한 분이여, 이 세상에서 탄생과 늙음의 차원을 저 멀리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푼나까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잘 통찰해 보고 어떤 곳에서나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욕망의 연기가 없어 편안한 사람, 고뇌 없고 헛된 바람도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탄생과 늙음의 차원을 넘어선 자이다. 』 <숫타니파타>
고통의 근원을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고, 세상을 통찰해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성찰을 통한 자각,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늙고 쇠약해지는 것이 두려워, 신에게 빌어서 해결해 보려던 옛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질은 피하고 헛된 희망으로 위안 삼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어떤 것도 넘어설 수 없다.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남자 얘기다. 그는 사고 후 몇 년을 굳은 의지로 서 보겠다고, 걸어 보겠다고 애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하기를, 이렇게 서 보겠다는 연습만으로 내 인생을 다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편한 두 다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휠체어를 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새 인생이 시작되었다. 휠체어 댄스에 도전했고, 그는 올림픽 금메달로 그 실력을 과시했다. 인생의 결실은 현실에 발 딛고 서서 꿈을 향해 노력해 가는 데 있다.
지금 한 해를 갈무리하는 이 계절이 모두에게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걷이를 마친 농부가 내년 농사를 위해 종자(種子)를 고르듯,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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