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째주 일요법회(7/14,일)
본문
햇살이 강하게 내려쬐는 7월 2째주 일요법회에는 80여명이 넘는 신도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석두스님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조계종단의 소이경전인 금강경의 한귀절로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문수2구에서 준비한 여름의 별미인 시원한 콩국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
법회 참석하신분들과 대중공양 준비해주신분,각처에서 봉사해 주신 100여명이 넘는 모든불자님들 모두다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 법문하시는 석두스님 -


- 문수1구 장혜정 (불도안)보살님 -

- 활짝핀 홍련 -

- 지극정성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하시는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보리라.”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스님 왈
“비단 불신(佛身)이 무상(無相)일 뿐만 아니라, 다만 일체 유위(有爲)의 상(相)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이는 망념으로부터 변하여 나타난 연고이다.”
부대사 왈
“여래께서 몸모양을 드신 것은 세간의 정(情)에 따른 것이니, 사람들이 단견(斷見)을 낼까 두려워서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웠도다. 거짓으로 삼십이상이라 하고 팔십종호라 하니 또한 모두 헛된 소리로다. 몸이 있는 것은 각(覺)의 체(體)가 아니요, 모양이 없어야 참다운 형상이로다.“
야부스님 왈
“山是山水是水니 佛이 在甚麻處오.
상(相)이 있고 구함이 있음은 이 모두 망(妄)이요, 무형(無形)과 무견(無見)은 치우친 소견에 떨어짐이로다. 당당하고 밀밀하여 어찌 간격이 있으리오, 한 줄의 한광(漢光)이 큰 허공을 빛내도다.“
많은 불서 가운데 금강경만큼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경전도 없을 것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불자는 있어도 한 번만 본 불자는 없을 것입니다. 선종을 종풍으로 삼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한 금강경은 선을 참구하는 선원 납자들에게도 늘 품에 품고 있어야 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경전입니다. 선의 정신에 조예가 부족한 불자들에게 금강경은 어렵게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은 주옥 같은 금강경의 여러 구절중에 이 한 대목을 가지고 선의 정신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금강경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선의 정신과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붓다의 주된 관심이 고(苦)의 해결에 있었듯이, 붓다의 깨달음을 새롭게 해석한 중국적인 선불교는 살아 숨쉬는 지금 이 땅 위의 삶의 현장을 중시합니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부처 그 자신을 부처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우리들의 의지처요, 안식처요, 기도의 대상인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부처 속에서 부처를 찾으면 찾을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럼 가엾은 중생들은 도대체 어디서 부처를 구해야 하나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중생들의 분별심이 고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봅니다. 분별심은 차별심보다 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하나를 둘로 보고, 좋고 싫음으로 분별하는 중생들의 이원적인 사고가 근원적인 고의 원인처임을 깊게 체득해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그냥 현상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중생은 부처님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의 정신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체성(體性)의 입장에서 보면 그 또한 망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부스님은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 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 속에 깊은 불교의 참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이를 이해했다면, 비로소 당신은 불문의 입구에 한 발을 디딘 불자일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