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세째주 일요법회(5/17...

본문 바로가기


참여마당
금강정사 소식

5월 세째주 일요법회(5/17,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5-17 17:50 조회3,482회 댓글0건

본문

새벽부터 거사님들이 모여 봉축법요식을 위한 대웅전 마당에 그늘막을 치는 것으로 금강정사의 일요일 아침을 깨웁니다.

총무 동민스님의 명상과 법문에 이어 새 임원 부촉장 전달식으로 일요법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일요법회도 "생활속 거리두기"에 따라 발열체크,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사용, 참배시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여법하게 봉행되었는데요.

법회 사회는 도안거사님, 집전은 청여거사님, ppt 지근거사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 인월 거사님이었습니다. 점심공양과 발열체크는 보현구에서 봉사해 주셨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1.jpg

- 5월 세째주 일요법회 -

2.jpg

- 보배경 -  

3.jpg

-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정진으로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4.jpg

- 총무 동민스의 법문 -

5.jpg

- 바라밀 합창단의 음성공양 -

5-1.jpg

- 주지스님을 비롯한 사중스님들 -

6.jpg

- 부촉받으신 신규임원들 -

7.jpg

- 봉축법요식을 위해 그늘막을 치고 계시는 거사님들 -

8.jpg

 

9.jpg

 

무엇이 윤회를 만드는가?


 금강정사 총무 동민스님



  불교에서 환생(還生)을 받아들이는 근거는 「의식의 연속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계를 예로 들면,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즉 물질계의 모든 요소가 우주 입자라고 알려진 것 속에 응축되어 있는 최초의 지점까지 추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 입자들은 이전의 우주가 붕괴되어 산산이 흩어진 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우주가 진화하고 붕괴하는 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소멸된 모든 것은 다시 존재하게 된다.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의식 또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일상의 경험을 통해 그 현존이 입증되고 있으므로 그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 마음 또는 의식이 전혀 다른 상황이나 환경에 직면하게 될 때, 변화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경험상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 또는 의식이라 부르는 것의 본성이 순간순간 바뀌며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마음 또는 의식이 몸의 생리학적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사실상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물질계와 상호 작용할 때, 의식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근원(토대) 에너지 같은 것이 마음에 있음에 틀림없다.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 과거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 이 삶에서 전생의 마음 또는 의식을 추적할 수 있다면, 물질계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연속성의 기원을 무한차원까지 추적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시작이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환생인 것이다.
불교는 인과론이 일체에 통용된다는 것을 믿는다. 즉, 모든 것은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원인과 조건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자(神)가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며, 따라서 마음 또한 그 이전 순간의 결과로써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원인과 조건(인과법칙)을 말할 때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어떤 것을 생성시키는 실체적 원인(因)과 그러한 인과관계에 작용하는 협동요소(緣)가 그것이다. 마음과 물질도 서로 의존하고 있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실체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불교가 환생을 받아들이는 근거이다.
세상을 여실히 관찰하면, 자아(atman)나 영혼과 같이 영원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은 없다. 이렇게 제법의 실상이 무아라면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즉, 무엇이 사후에도 존재하거나 다시 태어나는가?
이러한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제8아라야식을 상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유식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좀 더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달라이라마가 서양인에게 설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삶이란 오온의 집합이며,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의 조합이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두 개의 연속적인 순간에도 결코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지 않으며, 매순간 태어나고 죽는다. 오온이 생겨나고 부패하고 사라지는 매순간 우리는 태어나고 부패하고 사라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은 태어나고 사라진다.
자아나 영혼같은 영원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 없이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오온을 모이게 하는 힘(갈애, 탐욕, 의도)들이 신체적 기능의 정지 이후에도, 그 배후에 자아나 영혼 없이도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신체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을 때에도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삶이다.

영원불변한 채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어지고 전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다만,파괴되어지지 않은 채 매순간 변화하며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실제로 이 일련의 과정은 운동에 불과하다.
우리가 60세의 노인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재의 나와 60년 전의 어린 나는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삶을 마감하고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게 될 때,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단지 동일한 일련의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죽음과 탄생 사이의 차이는 생각의 순간의 차이일 뿐이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내생에서의 첫 번째 생각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의 문제는 큰 신비가 될 수 없다. 존재와 생성에의 갈애가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된다. 다시말해 윤회의 주체는 영혼과 같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바로 탐진치가 뭉쳐진 에너지(업력)인 것이다. 탐진치가 끊어지면 윤회는 더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윤회의 뒤에 깔려있는 진리와 그 추동력은 업(Karma) 즉, 인과법칙(因果法則)이다. 흐름의 법칙인 인과법은 연기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연의 법칙으로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마음의 작용에도 동일하게 인과법칙은 적용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 이유는 세상은 일도양단식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의하여 우리의 생(生)이 바뀔 때, 하나의 원인은 지난 세상의 업에 영향을 받아 복합적인 형태의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의 인이 그러할진대,우리의 삶은 하나의 인(因)과 하나의 연(緣)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무수한 인과 무수한 연이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그 다인다과(多因多果)를 바라는 지혜는 흑백논리로서는 역부족이다.
또 우리는 이미 과거 생(生)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업의 법칙을 믿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지난 세상에 그러한 행위에 익숙해진 습관을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난세상에 익힌 행복을 주는 카르마 역시 훌륭한 필적처럼 남아서 우리를 수행의 길로 이끌어 준다. 세심히 살핀다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살펴 지난 세상의 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의할 것은 업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업(카르마)은 창조적(創造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리 예정된 사주와 팔자, 미리 예정된 종말론 같은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하나 주의할 것은 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업(善業)도 있기 때문이다. 업은 가치를 지니지 않은 하나의 존재 법칙일 뿐이다.

인과법칙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한 사람은 업의 좀 더 깊은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므로 티벳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 삼바바(Padma Sambhava)가 이렇게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설령 내가 하늘처럼 드넓을지라도 내가 행동할 때에는 아주 공들여 인과(因果)를 축적하노라.」 마하반야바라밀!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금강정사안내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서비스 이용약관 | 오시는 길 |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