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0 일요법회(지장재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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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0일(일) 둘째주 일요법회 및 음력4월 지장재일 기도 봉행
밤새 내린 비로 나무들은 짙은 연녹색으로 윤기가 흐르고, 나무사이로 보이는 연등이 더욱더 선명하고 아름다워보입니다. 금강정사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하고 깜짝 놀랍니다. ^^
오늘은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의 법문과 음력4월 지장재일기도로 봉행되었는데요. 생활속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가운데 며칠전 발생한 코로나19 재확산 우려 소식이 전해졌는지 지난주보다는 적은 신도님들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청정사찰 실천지침을 준수하며 오늘도 손소독, 발열체크, 동참자확인, 법회시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코로나19의 조기종식을 발원해 봅니다.
오늘 일요법회 소식.. 사진으로 함께하세요~~~
-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법문하시는 석두스님-
-모든 의식은 자료집 배포없이 ppt 화면자료로 봉행되고 있습니다...-
-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
-영가시식은 총무 동민스님의 인례로 여법하게 봉행되었는데요. 동철스님, 유진스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 발원문 낭독하시는 정혜수(임옥실)보살님과 사회자 일우(한강섭)거사님 -
-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콩나물밥으로 대중공양을 준비해 주셨네요..^^ -
일체의 존재속에 있는 부처를 그대는 보고 있는가?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불교에서는 어떤 교학적 체계, 사상, 종교적 의례보다 깨달음을 우선시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불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의 불자들만의 탓으로 보다는 우리 스님네들의 책임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불교를 기복적 불교라고 우리 스스로 폄하하기도 하고, 순화하여 통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번 달은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날이고 해서 한 번 그 분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기에, 오늘의 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감히 제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심히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고, 제가 이해하고 있는 분상에서 말하고자 합니다. 한번 깊이 헤아리시고 헤아리길 바랍니다.
그분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놀랍다, 모든 개체들 속에 불성이 있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뜻은 좌선을 할 때 우리는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들 각자가 부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말로 그 분은 단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이나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세가 우리에게 기본적인 자세 또는 본래적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부처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산, 나무, 흐르는 물, 꽃과 식물들 –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 – 이 부처가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 각각이, 그 자신의 방식으로 부처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각개의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 자신의 의식의 영역속에서 그 자신에 의해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우리의 실제 존재의 한 부분이거나, 우리의 실제 존재에 대한 제한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존재하기만 할 때, 우리는 부처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좌선과 같은 어떤 것을 할 때, 거기에 불법이나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불성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좌선을 하기만 할 때 우리는 불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합니다. 불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단지 좌선을 하는 것, 있는 그대로 단지 여기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불성이라는 말로 뜻하시는 바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성은 우리의 본래 성품입니다. 우리는 좌선을 하기 전에 그리고 의식적으로 불성을 인지하기 전에, 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처의 활동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를 포기한다면, 참다운 이해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활동을 통해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소통을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점을 놓친다면 우리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이러한 삶의 방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처됨’, 또는 ‘주인됨’ 이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경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처라 합니다. 여러분이 항상 이런 식으로 존재 한다면 여러분은 부처 그 자체입니다. 부처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여러분은 부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부처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것을 자꾸자꾸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점을 놓치고 자신의 성취에 자긍심을 갖거나 이상주의적 노력으로 인해 의기소침해 진다면 여러분의 수행은 두터운 벽이 되어 여러분을 가두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할 때는 그냥 묵연히 앉아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의도와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생각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그 의도마저도 버리십시오. 이런 식으로, 아무런 성취의 관념이 없다면 그곳에서 여러분은 본래의 부처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좌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첫 말씀, “일체의 존재들 속에 있는, 그리고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불성을 보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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