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둘째주 일요법회(8/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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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둘째주 일요법회 사진소식을 전합니다. _()_
오늘 법회는 석두스님(총무원 총무국장) 법문으로 봉행되었는데요.
석두스님의 영상법문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오늘 점심공양 준비는 문수2구에서 수고해 주셨구요.
산신각 옆에서는 복숭아 낙과를 정리하는 운력이 한창이네요.
템플 샤워장 묵은때는 진공거사님께서 무더위를 뚫고 청소를 해주시네요..^^
법회후 전법단 식구들은 8월 정기모임 활동을 이어갑니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총무원 총무국장 석두스님
六塵不惡(육진불오)하면 –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還同正覺(환동정각)이라 - 오히려 정각과 같음이라
智者無爲(지자무위)어늘 - 지혜로운 사람은 조작이 없거늘
偶人自縛(우인자박)이로다 –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묶임이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六根(육근,육진)을 통해서 나와 대상인 경계를 인식합니다. 이 육근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밖을 볼 수 있는 창문 유리가 티끌과 먼지로 오염되어 있다면 우리는 밖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도 없거니와 오염정도가 심하다면 실제의 모습을 곡해하거나 분별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작용(육근)을 통해 앎이 일어날 때, 모두에게 똑같은 하나의 동일한 인식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업식이 다르고, 동일 선상에 있는 존재들일지라도 익혀온 습과 이해의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신수대사 오도송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 이 몸은 보리수이고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 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해) -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세.
신수대사가 5조 홍인대사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계를 읊어 보인 示法詩(시법시)입니다.
신수대사는 50세에 5조 홍인대사를 만났고, 90세가 되어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입궁하여 황재가 먼저 예를 올리는 如佛(여불)대접을 받을 정도로 큰스님 이었습니다. 삼제국사요 양경법주로서 전무후무한 예경을 받았으며, 초기 선종이 형성되고, 선사상이 정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6조 혜능스님의 오도송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니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 어느 곳에 때 끼도 먼지가 일어날까?
육근은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지만, 그 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가 잘못 쌓이면 오히려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도록 작동하는 요소로도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육근은 본래 청정한데 육근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잘못 해석하는 근본 오류의 기저에는 我(아)를 상정하고, 그 我(아)가 보고, 듣고,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그 물건은 본래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내 몸 속 어딘가에서 세상을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고 하는 착각 때문에 잘못된 정보가 쌓여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느낌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이 느끼는 나라고 이름할 수 있으면, 듣고 있는 그 순간이 듣는 나라고 이름 할 수 있습니다. 항존하는 그 무엇이 느끼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컷, 한 컷이 모여 영화라는 전체가 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육근은 塵(진)도 될 수 있고, 淨(정)도 될 수 있습니다.
육근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육근은 청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탐심과 욕구와 욕망들이 그 작용을 오염시킨 것 뿐입니다. 이 글에서 ‘싫어한다는 것’은 나의 잘못된 욕망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대로 극락이요, 천국입니다.
나의 생각으로 오염되었기에 지옥이 생겨나고, 고통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이는 無爲(무위)의 마음으로 세상을 수용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有爲(유위)의 마음으로 세상을 수용하기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그물에 걸리게 합니다.
조작이 없는 마음이 청정한 육근이 작용한 마음이며, 조작이 있는 마음이 육근이 청정하게 작동하지 못한 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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