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호법법회(8/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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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호법법회(8/6,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8-06 15:35 조회4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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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이 땅에 감로법을 널리 펴 부처님의 정법이 영원히 머물며

겨레와 국토를 진리광명으로 빛낼것을 굳게 서원합니다."             - 호법발원문 中

 

8월 호법법회가 8월6일(수) 스님들의 인례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벽암 지홍스님께서는 호법(법회)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시며 

소중한 법문말씀을 이어주십니다. 

 

벽암지홍스님의 8월 호법법회 법문주제는 "보우스님의 전법과 불교중흥의 역할"

법문동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채널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https://youtu.be/oDfWZAlbkxA

 

늘 사회는 대안성보살님께서, ppt 봉사는 원불성보살님께서, 

차량운행봉사는 청여거사님께서 수고해 주십니다. 그리고 공양실 점심공양 준비는 

광명구 식구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추가) 법회후 설법전에서는 수도권구(명등 대안성) 법등모임이 진행되었네요...^^

 

호법법회.. 사진소식으로 함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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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스님의 전법과 불교 중흥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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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과 보우의 등장

 

  조선은 건국 이래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억제하는 억불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하였다. 특히 세종 이후 불교 교단은 크게 위축되었고, 승려는 도성 출입이 금지되며, 승과 제도 역시 폐지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의 등장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보우는 조선 중기의 불교 억압 속에서도 **불교의 중흥과 전법(傳法)**을 실천한 대표적 고승이다. 그는 유년기부터 불교에 심취하였고, 수많은 선지식을 참방하며 수행을 쌓았다. 특히 명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고 돌아와 조선에 다시 법을 전파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유가 아닌,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재정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임제종의 법맥 전수와 선교 통합 (전법의 실천)

 

  보우 스님은 중국 천태산의 영봉사에서 법을 구해 임제종 법맥을 이어받은 후, 귀국하여 이를 국내에 다시 정착시키고자 했다. 당시 조선 불교는 종파가 해체되고, 전통 교단의 구조도 무너진 상태였으나, 보우는 선(禪)의 정통성과 전법의 계승을 통해 불교의 정체성과 정통성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는 선과 교의 일치, 즉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며, 교학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역설했다. 이는 고려 지눌의 ‘정혜쌍수’ 사상과도 상통하는 바 있으며, 폐쇄적이었던 조선 불교에 다시금 수행과 학문의 균형을 강조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단순히 교리 전파에 그치지 않고, 불교 본래의 수행적 본질을 강조했다. 이는 당시 형식에 매몰된 불교 교단의 쇄신과 전법 정신 회복에 큰 기여를 했다.


 승과 부활과 왕실의 후원 (불교 중흥의 실천)

 

  보우 스님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불교 중흥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명종(문정왕후)의 깊은 신임을 얻어 승과 제도를 200여 년 만에 일시적으로 부활시키고, 국사(國師)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매우 드문 사건으로,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불교 제도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


  또한 명종(문정왕후)의 지원으로 서울 중심부에 흥천사 중건, 선종 재조, 승직 정비 등의 실제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보우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닌, 현실 개혁을 이끈 실천적 중흥 승려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명종의 죽음과 함께 급격히 단절되었다. 후계자인 선조는 다시금 억불 정책을 강화했고, 보우의 제자와 승단도 다시 박해를 받았다. 이로 인해 보우의 불교 중흥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변화의 가능성은 후대 불교의 씨앗이 되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허응당 보우는 조선 시대 불교의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춘 인물로, 전법과 중흥이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단지 종파나 교단의 재건에 그치지 않고, 불교의 본질 회복과 한국 불교의 정통 계승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는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이용해 불교를 살리려는 전략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는 지눌이나 원효처럼 순수한 수행 중심의 고승들과는 다른, 현실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비록 그의 중흥이 일시적이었으나, 억불의 조선 시대에 불교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 불교의 재정비 및 조계종의 계승에도 간접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허응당 보우 스님은 단순히 수행자나 이론가를 넘어서, 전법과 중흥의 실천적 고승으로서 조선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불교의 회복 노력과 사상은 억불 시대에도 불교가 이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그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기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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