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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석두스님의 일요법회(8/9,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8-09 15:09 조회2,9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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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오기 일보직전, 흐뿌염한 구름이 가득한 7월의 둘째주 일요일 아침,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일요법회(7/12,일)가 봉행되었습니다.

석두스님께서는 “삶을 바꾸는 여덟가지 바른길”이라는 제목으로 관점과 견해를 바꾸는 방법인 팔정도중에서 정견(바른견해)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나의 행동, 인식, 의식, 그리고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견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서원이 되어야 함을 법문하셨습니다.
“청정사찰 실천지침”을 준수하며 진행된 둘째주 일요법회를 위하여 법회 사회는 도안 거사님, 집전 원경 거사님, ppt 보현덕 보살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에 진수 거사님, 문수2구의 점심공양 나눔봉사와 발열체크, 차량운행에 홍영규 거사님, 거사구에서 주차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특히 오늘은 문수2구에서 사용하신 방석의 세탁과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찬탄의 박수를 올리며, 끝나지 않은 코로나19와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 관리를 철저히 하시어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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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둘째주 일요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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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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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두스님의 법문 "삶을 바꾸는 여덟 가지 바른길" 중 첫번째 "정견"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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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점과 견해를 바꾸는 방법인 팔정도 중에서 "바른견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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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동참이 어려운 신도님들께서 일요법회후 영가기도 동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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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절을 올립니다 -

[복사본] 봉사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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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여덟 가지 바른길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오늘은 팔정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은 정견(正見)입니다. 해석하면 ‘바르게 본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바른 견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출가의 최종 목표는 ‘괴로움의 소멸’이였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생들의 전도된 생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전도된 생각일까요?

중생들은 괴로움을 느낀다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느낌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불교에서 느낌을 수(受)라고 합니다. 현대적으로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을 볼까요. 먼저 감각적인 느낌은 외부에서 형상이 있는 어떤 것이 나의 피부세포를 통해 신경세포를 경유하여 뇌에 전달되어 뇌가 기존에 축적해 두었던 어떤 느낌의 데이터와 비교하여 경험된 바에 의하여 존재가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과정이 느낀다고 하는 것의 현대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라는 것이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의 경험 지향적이라는 단점이 있어서 객관적 사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편차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느낌은 외부의 무엇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느낀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무엇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대로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각적 느낌을 대하는 붓다와 중생의 견해차입니다.

그럼 정신(정서)적 느낌은 어떨까요? 어머님이라는 단어를 보여주면 각 존재의 정서적 경험치에 따라 정의되고 연상되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정신적 감각이라는 것도 물질이 주는 느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외부적인 원인에 의하여 내부적인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합니다.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든, 모든 느낌은 인연의 결과일 뿐이라는 견해입니다.

감각적(정신적) 느낌의 발생은 이러한 인과 연의 결과이므로 인을 제거하면 연이 결과로 드러날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느낌을 소멸해야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이 보기에 중생의 업식은 느낌이 매순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돌이나 나무가 될 수 없는 한 느낌은 존재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현상으로 계속 발생될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느낌이란 놈은 태생적으로 의지해서 발생하기에 영속되지 않는 것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유무가 붓다와 중생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견해를 바꾸면 누구든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쉽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이다. 이 느낌은 지속성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봅시다. 이것이 행심(行深)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수행이 됩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새로운 업이 형성됩니다. 새로운 업은 나의 행동을 바꾸고, 나의 인식을 바꾸고, 나의 의식을 바꾸고, 나의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길은 견해를 바꾸는 ‘정견’입니다. 느낌과 표상작용과 의지작용, 이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고 깊이 바라볼 때 지혜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해를 가진 자, 그가 바로 수다원과를 얻은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불자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중생으로 지녔던 견해를 바꾸려는 자인 것입니다. 견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서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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