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스님의 일요법회(7/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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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오기 일보직전, 희뿌염한 구름이 가득한 7월 둘째주 일요일 아침,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일요법회(7/12,일)가 봉행되었습니다.
석두스님께서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사고방식을 바꾸고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와 마음에 달린 문제"라고 법문하셨습니다.
청정사찰 실천지침을 준수하며 오늘도 많은 불자님들이 일요법회를 위하여 봉사해 주셨습니다. 법회 사회는 도안 거사님, 집전 원경 거사님, ppt 지근 거사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에 명견수 보살님, 문수2구의 점심공양과 발열체크, 거사구의 주차봉사였습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찬탄의 박수를 올리며, 개인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시어 항상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코로나19의 조기종식을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둘째주 일요법회 -
- 청법가 -

- "무상(無常)의 가르침에 대하여" 법문 -

- 스님의 법문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진지해졌다가 웃음을 짓다가 ... -
- 새로 오신 법우님들께 금강정사의 안내를 하시는 전법단 -
무상(無常)의 가르침에 대하여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즉 변화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모든 존재들에게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누구도 이 진리를 부인할 수 없으며 불교의모든 가르침은 이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이 가르침은 참입니다. 이 가르침은 또한 무아의 가르침이기도합니다. 모든 존재가 항구적인 변화 속에 있다면 연속하는 자아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각 존재의 자성(自性)이란 변화 그 자체일 뿐이며 모든 존재가 그러합니다. 각 존재에 특수한 분리된 자성은 없습니다. 이것을 또한 열반의 가르침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고그 속에서 평정을 찾는다면 우리는 열반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완전한 평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은 우리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에 대한 가르침과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무상은 우리의 고통의 원인입니다. 객관적으로 이 가르침은 단순히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기본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옛 선지식께서는 “무엇인가를 그대에게 강요하는 듯 들리지 않는 가르침은 참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르침 자체는 진리이며, 그래서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적 경향성 때문에, 우리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게 느끼든, 싫게 느끼든 이 진리는 존재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것입니다. 불교는 개개의 특수한 존재자들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를 통하여 완전한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완전 속에서 완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완전은 불완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하지 않은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이 세상 밖의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단적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곤란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즐거움은 곧 곤란과 다르지 않습니다. 악은 선이요, 선은 악입니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수행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우리의 인생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라는 것이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 해본다 해도, 그것은 헛수고 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어떻게 느끼든 여러분은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곤란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정직하다면, 또는 충분히 솔직하다면,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약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겠지만 항상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렵겠지만 때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럽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곤경에 처해 있다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때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같은 진리입니다. 때로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발견하고는 스스로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상관없이 사고방식을 바꾸고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복은 비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이며,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결국은 최상의 복덕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진정한 불자요,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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